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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지하교회를 위한 최우선적 준비-『지하교회를 준비하라』 4부

Posted by Rev. Eric Foley on with   Comments

(리처드 웜브란트 목사의 저서 『지하교회를 준비하라』(3)  덧붙인 폴리 목사의 서론  4부입니다. 폴리 목사의 서론과 순교자의 소리 전기작가인 머브나이트의 서문이 포함된 『지하교회를 준비하라』는 아마존(Amazon)에서 주문하거나, 한국 순교자의 소리 웹사이트 도서 페이지에서 참조할  있습니다. 폴리 목사의 『지하교회를 준비하라』서론 1부를 보시려면, 이곳 클릭하세요)

이것이 바로 웜브란트 목사가 『지하교회를 준비하라』에서 우리 기독교적 삶의 방식을 보호하는 것이 아닌, 그렇게 살아내는 데 실패한 우리의 회개에 대해 가장 먼저 서술한 이유이다. ()에 대해 누군가에게 무언가 가르치기 전에, 우리가 다른 이들의 죄악 된 자기 창조에 반대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온전한 기독교 전통이 언제나 지켜왔던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며,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위해 우리 자신의 자기 창조되었던 삶을 그 분께 돌이켜 굴복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정체성을 규정지으려는 행위 대신 우리 자신에게서 손을 떼고, 사도 요한과 같이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라고 고백해야만 한다.[1]

모든 형태의 자기 창조는 근본적으로 기독교와 공존할 수 없다. 그러나 성() 혁명에 연루되었던 과거 우리의 공모죄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 웜브란트 목사가 공산주의자들이 우리의 대적이 아님을 강조했듯이, () 혁명에 공모했던 이들 또한 아주 명백한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다. 그 분의 사랑은 빛의 형태를 취하사 우리 각자가 자신의 이면을 볼 수 있게 하시며, 우리 창조주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신다.

그러나 이 빛을 우리의 벗인 성() 혁명가들에게 가져다 주기 전,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이 경험한 방식을 따라 기독교 신학을 개조하려 했던 우리의 어설픈 노력들 또한 회개해야 한다. 기독교 신학은 때로 그 책무가 소수의 손에 넘겨지곤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후(主後) 이천 년이 넘도록 그 근본적 형태를 간직해왔다. 우리가 스스로를 재조각(re-sculpt)해서는 안 되듯이, 우리가 물려받아 왔던 믿음 또한 재조각해서는 안 된다. 감리교 신학자 토마스 오덴(Thomas Oden)이 조언한 바와 같이 신학자의 묘비는 그 어떤 새로운 것으로도 신학에 이바지하지 않았다라는 말 이상 더 훌륭한 비문(碑文)을 감당할 필요가 없다. [2] 우리는 어디서나, 항상, 모든 사람들이 믿어 온 그 믿음이라는 레린(Lérins)의 빈센트(Vincent)의 말대로,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든지 주의 깊고 결연하게, 최대한 조심성을 갖고서 각자 기독교인으로서의 부르심을 계승해야 한다. [3]

이는 매우 중요한 점이다. () 혁명을 옹호하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사랑이나 자유와 같은 단어들은 우리 믿음을 재조각(re-sculpt)하는 끌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단어들은 세상에서 그들이 사용하는 것 이상의, 기독교적으로 아주 다른 무언가를 의미하고 있으며 그 의미는 우리들의 비교적 짧았던 포스트모던적 경험에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닌, 기독교 역사와 신학의 오래된 전통을 통해 얻어야만 하는 가르침이다.

역사적으로 내려온 기독교 신앙에서, ‘자유란 지금의 이 타락한 시대 속에서 희망되고 있는 전형적인 자유처럼 통제에 대한 제거가 아니다. 도리어 죄로부터의 자유, 또는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e)의 정의대로 더 이상 죄를 원하지 않는 그 은총의 상태를 방해하는 것들로부터의 자유인 것이다.[4] 이는 그 최종적 상태’, 즉 다시 말해 우리가 지금 이 생()에서는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서면 우리에게 온전히 알려질, 요한일서 32절에서 말하는 장래에 어떻게 되는 것(What we will be)”에 비추어서만 이해될 수 있는 자유인 것이다. 존 리스트(John Rist)는 자유에 대한 고전적인 기독교의 이해와 함께 그 현대의 축소된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언제나 그 은총의 최종적 상태에 가까워진 그 정도만큼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최종적 상태를 배제하고 개인의 자율성이 스토아적 감내를 압도해버리면, 우리에게 유일한 선택은 어떠한 금기들로부터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자유를 얻기 위한 목표로 나아가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금기들이란 후손을 잇고 양육해야 한다는 의무 등의 도덕적 요소들뿐만 아니라 신체적 요소까지 포함하는데, 이를테면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제한에서 자유롭고 싶어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5]

죄로부터의 자유라는 이 같은 이해는, 자칫 정말 사랑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하나님 사랑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돕는 데 있어 필수적인 것이다.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동조나 포용, 또는 선의(善意)’의 문제가 아니라, 데이빗 쉰들러(David Schindler)가 주목한 바와 같이 보다 더 심오하며 전적으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어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명과 세상의 만물들을 실재(實在)하게 만들고 우리 생명과 만물들의 기본 질서가 되는 바로 그것이다. 혹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가장 깊고 가장 적절한 질서와 의미를 부여해준다.[6]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 분의 영광된 질서의 회복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요한복음 316절에서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실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시어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확증하시고자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도리어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317절에서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하나님의 사랑은 타락한 피조물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올바른 재질서화(re-ordering, 바로잡는 것)를 의미하며, 이는 세상이 우리와 더불어 자기 창조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들을 바로 잡으셔야만 하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증언이 아닌, 가장 고통스러운 우리 육신의 십자가 형벌을 통해 하나님 사랑을 처음 경험하게 되는 이유이다. 우리는 그릇된 모양으로 뒤틀려졌고 그로 인해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연인의 사랑이기보다는 원수의 사랑과 같다.

이것은 우리가 본래 원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 사랑은 우리가 주 안에서는 기쁘나, 육신으로서는 행복하지 않게만든다.[7] 웜브란트 목사의 책을 읽고 그를 따르는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웜브란트 형제는 그 안(감옥)에서 큰 기쁨을 누렸으나 그의 육신은 행복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육신은 모든 시간 비참했다. 그의 육신은 고통 당했지만, 그의 영혼은 높이 날아올랐다.”[8]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역설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육신이 접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것들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진실인지에 동조해주시지 않는다. 그 대신에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215절의 말씀처럼 만물을 새롭게하신다. 이는 쇼워스(Showers)가 주목한 바와 같이 우리가 새로 만들어져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까지 포함한다.

우리 욕구의 다수가 사실은 선하고 필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옛 본성 중 어느 부분도 남아있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하게 새로 만들어져야만 하는 것이다심지어 선한것들조차 십자가 죽음 아래 내려놓아져야 하며 예수의 성품으로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우리의 혐오스러운 특성들, 즉 거짓말과 욕설과 풍기문란 등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할 어떠한 것들로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 이를테면, 진리를 말하고 깨끗한 언어로 이야기하며 우리의 자유로운 시간을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데 사용하는 것들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뛰어난 특성조차 예수 성품에 미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직함이나 진실함, 이타심 등조차 모두 새롭게 만들어져야 하며, 이로써 우리는 주님의 정직함, 진실함, 이타심을 소유하게 된다.[9]

예수는 그 분의 십자가로 빚어진 삶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죽으신 것이 아니라 또한 그것이 우리의 삶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그 십자가 삶 속으로 구원해내신 것이다. 이것이 그 분의 부활 생명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예수는 자기조각(self-sculpting)된 우리의 삶에 너그럽게 동조해주시려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는 우리가 그 분의 생명을 받아 우리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며 그것을 지속적으로 세상 가운데 다시 나타내게(re-present) 하시려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이다.[10] 이는 언제나 세상 앞에서 그 분의 올바른 질서가 유지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되돌려드리도록 맡겨진 그 사랑은, 가장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욕망을 포함한 모든 것보다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사랑이다. 은혜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포용이 아니라, 스스로를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온전히 맡기는 자들의 죄와 사망을 넘어 선 그 분의 승리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작은 사랑에 대한 그 분의 크신 사랑의 굴복이 아니라 그 분의 크신 사랑에 대한 우리의 작은 사랑의 굴복이며, 이는 역사 속에서 언제나 그래왔듯이 오늘날 전세계 지하교회에서 구현된다. 우리는 이 교회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며, 배워야만 한다. 지하교회는 성()혁명과 대조를 이룬다. ()혁명은 생명 에너지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희생시킨다. 그러나 지하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생명 에너지를 희생한다. “지하교회의 간증은우리로 하여금 현대 남성과 여성이 자기 자신보다 다른 어떤 (Something)에 헌신하며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진실로 가능하단 말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는 스테판 아두바토(Stephen Adubato)의 언급처럼 말이다.[11]

[1] 요한일서 3 2(개역개정) 참조.

[2] 케이트 셸넛,「고전 기독교를 발견한 감리교 신학자, 토마스 오덴」(2016, 기고

-http://www.christianitytoday.com/gleanings/2016/december/died-thomasoden-

methodist-theologian-who-found-classical.html)

[3] 레린의 빈센트,Commonitory(5세기 쓰인 기독교 논문』(ch. II, §6; NPNF

Series II Vol. XI p. 132)

[4] M. 리스트,Augustine Deformed: Love, Sin, and Freedom in the Western

Moral Tradition (2014,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p. 9)

[5]위와 동일.

[6] 데이비드 L. 쉰들러,Ordering Love: Liberal Societies and the Memory of

God (2001, 뉴욕 Wm. B. Eerdmans 출판사. Loc. 25-35)

[7] CDP,「하나님께 이끌림을 받는가, 그렇지 않은가」(2012, 기고문-https://

outpostpilgrim.wordpress.com/tag/richard-wurmbrand/)

[8] CDP,「하나님께 이끌림을 받는가, 그렇지 않은가」(2012, 기고문-https://

outpostpilgrim.wordpress.com/tag/richard-wurmbrand/)

[9] 에이프릴 쇼워스, 「갈라디아서 5 17...무슨 뜻인가??”』 (2011, 기고

-http://www.talkjesus.com/threads/galatians-5-17-meaning.35687/)

[10] 에브라임 래드너,A Time to Keep: Theology, Mortality, and the Shape of a

Human Life(2016, 2016, 미국 텍사스주() 웨이코 베일러대학교 출판부, Loc. 55)

[11] 스테판 아두바토,「혁명적 이끌림」 (2016, 기고문-http://www.hprweb.

com/2016/06/a-revolutionary-attr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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