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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실천

[듣기 히12:1, 롬13:14]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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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2:1] & [로마서 13:14]

흔히 기독교인들은 북한과 남한의 길고 복잡한 분열 상태를 의 차이에 비교하곤 한다. 우리는 국경의 남쪽이 선이 자리하고, 북쪽은 악이 자리한다고 생각한다.

북쪽에서 사람들은 단지 김씨 일가에 복종할 뿐만 아니라 그 일가의 형상을 입도록 강요받는다. 북한 사람들은 두발과 옷차림에 대해서도 엄격한 규율에 복종해야 한다. 상의에는 언제나 김일성 배지를 달아야 한다. 정책들은 사람들이 정부를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도록 강요한다.

국경 이남인 대한민국에 서서 북한을 엿보면, 우리 마음에는 동정심이 일어난다.

“그렇게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에서 살아야 하다니 너무 끔찍하군!” 라고 외친다.

그렇지만, 북한만 이 우상 숭배를 독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두 가지 성경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히브리서 12장 1절을 보자. 이 말씀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가르친다. 훌륭한 운동 선수와 같이, 기독교인은 선한 싸움을 하는데 있어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없애버리라고 명령 받았다.(딤후 4:7) 예를 들면 경기 전, 프로 수영 선수는 자주 면도를 하고 매끈한 수영복을 입을 것이다. 기록을 단축시킬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하는 것이다. 수영 선수가 티셔츠를 입고 경기에 출전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듯이, 기독교인 역시 그 성과를 방해할 죄를 껴안고 가는 것을 꿈도 꾸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다음에 살펴볼 말씀은 우리가 그 무언가를 벗어버리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프로 수영 선수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프로 선수에게 모든 수영복이 똑같지는 않다. 좋은 수영복이 금메달을 얻느냐 아무것도 얻지 못하느냐의 차이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회사들은 저항을 줄이고자 나사(NASA)의 기술을 가져와 수영복에 적용한다. 수영복이 받는 저항이 적을수록 기록 시간이 단축될 수 있기 때문에 프로 수영 선수들은  좋은 수영복을 위해 기꺼이 거액을 지불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입는 정체성이선한 싸움에서 우리의 성과를 극적으로 바꾸어 버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13장 14절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명령하는 이유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정체성은 아니다. 예를 들어 북한은 자국민들에게 외국의 영향력을 벗어버리고’, 김일성으로 옷 입으라고 강요한다. 이슬람 국가들은 자국민들에게 악행을 벗어버리고’, 이슬람교로 옷 입으라고 지시한다. 사람들은 늘 자신이 입기로 결정한 본질의 노예가 된다. 기독교인들은 북한과 이슬람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성향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기 어려운 것은 자유 세계 역시 우리가 어떠한 동질성의 노예가 되게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동질성이란 그리스도가 아니다.

자유 세계에서의 자유란 누구나 원하는 사람이 되거나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허가이다. 이러한 자유에 대한 제약은 무엇이든 억압적이며 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사상이 주장하기를 인간이란 자기 손으로 빚어진 진흙이다. 성형수술로 외모를 바꾸고, 원하는 사람과 잠자리를 갖고(결혼이라는 성가신 관계 없이), 우리가 갈망하는 그 어떤 형태로든 쾌락을 찾는 데 자유로워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로 옷 입을 때의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입은 그 정체성에 스스로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자유 세계의 기업들은 우리가 자신의 외모와 정체성에 계속 만족할 수 없게 만든다. 치과 의사는 우리 치아의 색깔이나 위치에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성형외과 의사들은 언제나 새로운 유행을 제안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무리 유행하는 옷을 사더라도, 우리는 아주 잠시만 그 옷을 입을 수 있다.  영화와 텔레비전은 항상 우리가 적용하고 싶은 새로운 패션과 음식점, 라이프 스타일과 헤어스타일을 소개할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사랑이 식어 우리의 마음은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줄 누군가를 계속해서 찾아다닐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마치 우리의 욕망과 같이 계속해서 변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정체성을 다른 사람에게 입증해야 한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정체성이 전적으로 우리 지성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행복은 좋은 점수를 유지할 능력 여하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능력을 자기 정체성의 바탕으로 둔다면, 그 사람은 휴식과 자기 관리를 희생하고 오래 일하며 낮은 임금을 받게 됨으로써 건강을 해칠 위험에 빠질 것이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것은 그 정체성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는 의미이다. 고되고 지루한 임무인 것이다.    

이러한 자유는 분명 논리적인 정체성이지만, 기독교인들이 입으라고 명령 받은 의복은 아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한다. 여느 정체성과 같이, 이 옷을 입으면 우리는 그의 노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종에게 자유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주인이시다.

예수님은 이렇게 명령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그리스도의 자유가 세상의 자유와는 전혀 비슷해 보이지 않더라도, 그분의 명령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더 하얀 치아나 갸름한 광대뼈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완벽해지라고도 명하지 않으신다. 대신 그분은 단 한 가지를 요구하신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 속의 망가진 부분을 고치실 수 있음을 알고 겸손히 그분께로 나아오는 것이다. 그분은 복종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많이 넘어지든지 상관없이 그분과 함께 거하기를 요청하신다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정체성이 무엇이든, 그리스도는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께 정직해지는 것뿐이다. 우리가 그분으로 옷 입고 있지 않다면, 그분은 우리가 우리를 가로막는 정체성을 벗어버리고 그분으로 옷 입을 수 있도록 겸손하게 초청하신다.

이것이 국경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남한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에게 요청하는 바이다. 이 요청은 모두에게 언제나 열려있다.

당신의 정체성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기  결코 늦지 않았다.

당신은 지쳐 있는가? 무거운 짐으로 고생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께 오라.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벼우니 말이다.

Tags: 겸손, 남한, 북한, 예수, 용서, 우상 숭배, 자유, 하나님, 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