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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요20:19-31] 의심하는 도마와 부활절의 두 번째 부활

Posted by Margaret Foley on with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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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19-31

지난 부활절에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사도들에게 전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대해 살펴보았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아침에 사도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들은 문을 걸어 잠근 채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사도들에 대한 계시가 아니다. 마리아에 대한 계시도, 우리에 대한 계시도 아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계시일 뿐이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2019-31절을 읽거나, 다른 성경 구절을 읽을 때, 우리가 마땅히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무엇을 계시하는가?”

요한복음 2019-31절에서 이러한 물음은 특별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 집중하기 위해 이끌려온 우리의 시선이 도마의 이야기만을 주목하기 쉽기 때문이다.

본문의 기록으로 인해 도마는 의심하는 도마로 불리곤 한다. 때때로 우리는 이 이야기를 도마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하면 안 되었다.”라며 도마의 성품을 꾸짖으며 읽기도 한다. 그런 후, 이 진리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결코 의심하지 않을 거야.” 그러나 요한복음 2019-31절을 이런 식으로 읽는다면,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성품이 위엄 있게 계시되어 있는 것을 놓치게 된다.

그러므로 도마는 뒤로 하고 그 대신 하나님 한 분께만 집중하여 요한복음2019-31절을 함께 읽어 보도록 하자.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는 이 본문에서 그분은 어디에 계신지를 이해해야 한다. 니케아 신경은 하나님이 세 위격, 즉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한다고 천명한다. 성자는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하나님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이시다.”

또한 본문의 문맥도 성자의 목적은 성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한 예로, 요한복음 14장9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19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라고 하셨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데 필수적인 부분은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는 것임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이 본문 시작 부분에서 예수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사도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방 안에 가둔 것을 알 수 있다. 왜일까?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못 박은 종교 지도자들이 두려웠던 것이다. 만일 당시의 제자들에게 이유를 묻는다면, 생명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실제는 사실 그들의 생명이 아니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리스도께서 정의하신 생명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제자들은 실제로 그들의 호흡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다. 만일 생명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오히려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좇아 십자가로 향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면 목숨을 잃어야만 목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호흡을 보존하려고 동분서주하다 오히려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생명 없이 호흡하는 사람들을 보시며 죽은 자들이라고 하셨다. 그들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어찌 보면 이 본문의 사도들은 죽은 자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가둔 그 방은 무덤이 되어버렸다. 부활절에 예수님은 무덤을 떠나셨으나, 그날 제자들은 자신들의 무덤으로 들어간 꼴이 되었다. 두려움과 자기 보호는 그들을 이 무덤에 가둬버렸고, 그들 스스로 그 무덤을 나오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누가복음 17장33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라고 하셨다. 여기서 이 말씀의 한 전형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그분의 죽음(death)을 통해, 사망(Death)을 이기셨다. 반면, 제자들은 죽음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나올 수도 없는 방에 스스로를 가둬버렸다. 그들은 여전히 죽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맥락이다.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배반했으나,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 나타나 자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나타내 보이셨다. 이것은 중요하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버리고 영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죽음에서 육체적으로 부활하셨으며 오늘날도 육신을 입고 계신다. 때때로, 우리는 도마의 실수는 육에 대한 집착이었다고 생각하여 영적인 것에 집중해야 한다!”라고 결론짓는다. 하지만,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분은 육이 없는 그저 영적인 존재로 오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상처를 지니셨으므로 제자들이 만질 수 있었다. 도마만이 육적인 것을 신경 쓰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다. 예수님도 육적인 것을 신경 쓰셨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육신이 죽음이나 시간 혹은 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여러 면에서 우리와 흡사하다고 말한다. 우리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육신은 완전했다. 유일한 흠집은 그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 즉 요한계시록이 말하듯이 항상 남아있는 상처 말이다. 요한이 천국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에도, 예수님은 이 상처를 여전히 지니고 계셨다. 그러나 이 상처는 수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은 비난이나 불평이 아니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가 하는 말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표현하지만 그 효과는 제한적이다. 만일 우리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면,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의 인사에 화답할 수는 있으나, 우리의 말 자체는 상대에게 평강을 전혀 끼치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다.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반드시 일어난다. 그분의 말씀은 언제나 그 목적을 달성한다. 한 예로,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의 말씀 또한 효력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4장35-41절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폭풍을 잠잠케 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신 말씀 또한 폭풍을 잠잠케 한다.

평강과 기쁨을 사도들에게 주신 후,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셨다. 예수님이 왜 숨을 불어넣으셨을까?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숨(생기)을 불어넣어 사람을 창조하셨다. 예수님도 다시금 창조하고 계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숨 이상의 것을 주신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며,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생명을 그들에게 부여하신 이후, 사도들은 그분의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얻은 죄 사함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의 숨과 죄 사함을 통해, 제자들은 위로부터 태어남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도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성경은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라고 말한다. 과연 성자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그리스도께서 즉시 도마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도리어 예수님은 사도들이 도마와 대화할 때까지 기다리셨다. 사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에게 주어진 똑같은 명령, 즉 들은 말씀을 전하라는 것을 그대로 따랐다. 제자들은 도마에게 다가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증거했다.

그러나 도마는 그들의 증거를 거부했다.

예수님께는 그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고자 하는 10명의 사도들이 있었다. 이 제자들은 도마에게 증거했다. 도마는 그 증거를 거부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은 도마에게 자신을 보이셨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다. 자신의 양 중 어떤 양이라도 이탈하여 떠돌면 그들을 쫓아가신다.

예수님은 요한복음637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 다시 요한복음 639절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라고 하셨다.

도마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그분의 증거를 거부했으나 예수님은 여전히 도마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렇다고 이처럼 예수님을 시험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시면 그에 보답하겠다는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여, 저를 치료해 주시면, 당신을 믿겠습니다.” 혹은 예수님, 당신이 살아 계시다면, 저에게 좀 나타나주세요!”라고 하면 안 된다.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는가? 어쨌든, 도마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닌가? 우리도 똑같이 할 수 있지 않은가?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육적인 증거자가 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들에게 이 목적을 명하셨다. 그들의 증거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이로 인해 우리는 그분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 영원한 삶을 얻게 된다. 우리 안에 의심이 밀려올 때, 우리는 성경을 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성경에서 우리는 도마와 마리아 그리고 사도들의 증거를 받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신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우리는 그분의 얼굴을 직접 본 도마보다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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