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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마5:21-37] 기독교인에게 율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Posted by Margaret Foley on with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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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5:21-37

이 말씀은 지난 주에 나눴던 짠맛을 잃은 소금과 숨겨진 빛에 대해서 논하신 이후 바로 등장한다. 우리가 배운 대로, 그리스도는 아무 맛이 나지 않는 세상에 맛을 더하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이 신령한 양념이 되라고 소금의 이미지를 사용하신 게 아니다. 대신, 그리스도는 세상을 죄의 부패로부터 막는 방부제로서 율법의 역할을 설명하려 소금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이 계속 썩어가는 동안, 대신 우리 자신의 의로움을 북돋우기 위한 수단으로 율법이 사용되고 있다는 심각한 모순을 전달하기 위해 짠 맛을 잃은 소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유사하게,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는 것도 하나님의 형상을 세상에서 나타내기 위하여 창조 받은 사람이, 자신을 숨기는 사람의 모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3:19)” 자신을 숨겨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죄는 사람과 율법을 쓸모 없는 수준으로 격하시켰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여 이 상황을 바로잡으려 하시는가? 아니다. 그분은 마태복음 5:17에서 이에 대한 답을 주신다. 예수님은 새로운 법 또는 기존에 있던 법 안에 새로운 통찰력을 제시하여 이 상황을 바로잡으려 하시는가?  “결코, 아니다! ”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321절에 말한 것처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율법을 만들지도 않으신다. 대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유일한 율법을 성취하신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하신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여행을 해야 한다. 우리는 시간이 존재하기 전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말씀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 1:1).  만세 전에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 복종하셨고, (요 6:38; 요 1:8)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에게 영광을 주셨다 (마 3:17, 요 13:32). 바로 이것은 과거에 그랬던 것이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다.  

이런 말씀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보다 더 크고 능력이 있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복종하고, 덜한 자가 더 큰 자에게 굴복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원죄로 말미암아 뒤틀린 까닭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말씀은 아들이 아버지의 힘이며 (고전 1:24), 성삼위 일체 안에 복종하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사랑 위에 기초한 것이라고 말한다.

타락한 사람은 사탄처럼 힘의 목적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많은 힘을 가지게 되면 우리가 바라던 대로 더 할 수 있고, 우리가 이루기 원하는 것들을 더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힘을 우리가 소유하거나 소유하기를 원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사탄이 예수님을 광야에서 유혹할 때, 사탄은 힘에 대해 이렇게 이해하고 행했다.

사탄은 그리스도에게 말했다.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

심지어 사탄은 만국이 다 보이는 지극히 높은 산으로 그리스도를 데리고 갔다. 만국을 손으로 가리키며 사탄은 그리스도에게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라고 했다. 사탄은 힘과 힘의 포상물들을 그가 소유하고 줄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사탄은 자신이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킨다. 하나님은 능력을 위임한다. 그분은 힘을 혼자 독차지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 사용하시지도 않는다. 힘은 그분에게서 방출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 타락한 까닭에, 흔히 이 힘은 발산한 사람들로 인해 악용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된다. 원래 사용되어야 하는 방식 즉 하나님께 복종함으로써 겸손하게 그분에게 다시 반사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그분이 누구이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하나님에게 보일 수 있다.

그리스도는 사탄을 제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성부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사탄의 유혹을 거부하셨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시지 않으셨기에 돌을 변화시키거나 뛰어내리기를 거부하셨다. 그리스도는 아들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셔서, 그분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보고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해에 따라 혹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힘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힘을 사용했다.

힘에 대한 이런 이해를 가지고 우리는 마태복음 521-37절의 말씀이 율법의 창조나 율법의 파괴에 대한 것이 아니며, 율법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율법을 이용하는 타락한 사람의 지배로부터 율법을 자유 하게 하는 것이며, , 사람에게 타당한 의로움의 기준을 만들어 사람이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율법의 목적이 아니다. 율법의 목적은 더 부패되는 것으로부터 타락한 세상을 보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율법을 지키기 쉽게 율법의 기준을 낮춘다고 해서 타락한 세상이 보존되지는 않는다. 세상이 더 심각한 부패 가운데 빠지며 우리가 세상과 마찬가지로 앞 못 보는 동안, 율법의 기준을 낮추는 일은 그저 우리가 스스로를 의롭다고 느끼게 할 뿐이다.

율법이 방부제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율법에 전적으로 굴복할 필요가 있다. 이는 율법이 규정한 행동들 (: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에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몸만이 아닌 혼과 영으로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되는 태도에도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육, 혼 그리고 영으로 율법에 굴복할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초대 교부들은 이것이 예수님이 오른 눈으로 의미하신 거라고 이해함)과 우리의 의지(초대 교부들은 이것이 예수님이 오른손으로 의미하신 거라고 이해함)가 우리 몸을 올바르게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잘못 행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율법을 우리의 생각과 의지에 맞춰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율법은 사람이 짓는 죄의 부패를 멈출 수 없다. 우리는 살인하지 않지만 분노가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방식으로 간음하지 않지만 욕정의 노예가 되었다. 우리는 이혼 증서를 내어줄 때 의롭다고 느끼지만, 우리 자신과 예전 배우자가 간음에 빠져드는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의 맹세는 거룩하게 들리지만 그것들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거짓말의 포로가 될 뿐이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는 율법에 결코 복종하지 못한다. 우리는 율법을 통제하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사탄이 이 세상의 왕국들이 자신의 것으로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우리는 마치 의로움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것인 양 행동한다. 즉 율법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준수하면 누구든지 의롭다는 것이다. 하지만 죄의 부패를 우리 안, 혹은 세상 안에서 중단할 수 없기에 우리의 해석은 육과 영 모두를 지옥으로 인도할 뿐이다.

하나님은 몸이 영에게 복종하도록 그리고 영이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우리를 설계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죄에 빠졌다. 죄는 우리가 율법에 복종하고, 우리 영이 우리 몸의 고삐를 잡은 것으로 생각하며, 마치 우리 영이 하나님께 고삐를 잡힌 것인 양 우리를 기만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해석으로 율법을 통제하려는 까닭에, 우리 영은 율법에 복종하지 않으며, 그 결과, 우리 몸은 전혀 고삐가 잡히지 않은 채 날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몸이 우리 영보다 더 강력하다고 느끼는 이유이다. 우리의 타락 안에서, 그것은 사실이다. 우리 몸은 죄로 말미암아 악화되어 죽음의 기이한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 영이 더 이상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영은 약해지고 무력해지고, 사실, 죄 안에서 죽었기에 우리 몸에서 고삐를 잡지 못한다.

벤허 영화를 생각해 보자.

영화의 한 장면에서, 벤허는 노예 생활에서 도망쳐 사막에 도달한다.  천막을 치고 생활하며 전차 경주로 생계를 이어가는 유목민 한 명이 그를 받아들인다. 어느 날, 유목민 캠프는 장차 있을 경주를 위해 사막에서 연습하고 있는데, 전차를 이끌어가던 말들이 놀라기 시작하더니 캠프로 돌진한다. 그 말들은 통제 불능이고, 빈 전차는 말 뒤에 질질 끌려 다닌다. 캠프는 광분한 말들과 전차로 인해 파괴된다. 결국, 벤허는 전차 위로 뛰어올라 말들을 진압한다.

벤허가 말들보다 강하기 때문에 말들을 진정시킨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한 마리의 말이라도 벤허보다 훨씬 더 강하지만, 말들은 벤허에게 복종했다. 그것이 바로 전차 말들이 행하는 것이다. , 말들은 운전수가 명령할 때 그 말에 복종한다.

우리 몸은 말들이고, 우리 영은 전차인데, 둘다 탈선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세례를 통해 우리 영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전차는 더 이상 비어 있는 무력한 수레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고삐를 잡으며 명령하시면, 우리 몸은 그분에게 복종해야 함을 알고 있다. 우리 영은 충분히 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몸을 노력으로 통제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힘이 필요하지 않다. 몸은 죄로 말미암아 날뛰어 왔어도 진정한 주인을 알아본다. 몸은 그분의 명령에 복종한다. 모든 것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분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명령만을 똑같이 지시하신다.

우리는 율법에 복종함으로써 구원받지 못한다. 우리 몸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는 그저 율법을 훼손시킬 뿐이다. 우리는 오직 율법을 휘저으며 돌아다닌다. 하지만 율법은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려고 주어진 것이 아니고, 또한 생명을 가져오기 위해 새로운 법이 주어진 것도 아니다.

대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통해 우리 안에 임하셨기에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 복종하듯, 그분은 전차와 말들인 우리를 복종 가운데로 이끄신다. 예수님께 복종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그분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그분만의 임재 안에서 율법을 완성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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