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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마25:31-46] 심판날에 염소가 되지 않는 법

Posted by Margaret Foley on with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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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31-46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단지 바리새인들에게 실망하신 것이 아니다. 종교적인 사람들 전체에게 실망감을 표하고 계시는 것이다(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다면 이 설교를 보라). 율법에 무지하거나 그것을 지키지 않는 데 관하여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는 대신, 예수님은 이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 부르시며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한다고 책망하신다. (마 23:25)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알고 따르면서도 율법을 통해 자신의 마음이 변화되는 일은 거부하기에 그들에게 실망하신 것이다.

기독교를 그리스도의 명령이 적힌 리스트 따위로 축소시킨다면, 우리 역시 이러한 죄의 희생양이 되버리고 만다. 고린도전서 13장 2절에서 바울이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 고백한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는 누군가의 행위를 완벽하게 만드는 일에 관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마음을 그분 보시기에 합당하게 빚으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일에 관한 것이다.

니케아신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말해준다. 성경도 그 시작부터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시되 그분의 손과 호흡으로 직접 하셨으며, 그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말씀한다. 하지만 우리는 창조에 대해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매우 다르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들은 무언가를 만들 때, (1) ‘구제불능이란 생각이 들면 아직 과정 중에 있는 창조물을 내던져버리곤 한다. 그리고 (2) 창조물이 완성된 이후에는 그것에 대한 흥미를 점차 잃어버린다. 가장 훌륭한 음식일지라도 결국에는 잊혀지며, 최신 휴대전화 역시 더 향상된 새 모델을 사기 위해 결국 내버려지고 만다.  가구나 옷도 오래되었다거나 유행이 지났다고 여겨지기라도 하면 없애버린다.

그러나 하나님께 창조란 지속적인 과정이다. 하나님은 마치 한 번 태엽을 감으면 배터리가 다 될 때까지 걸어다니는 태엽 인형처럼 인간을 만들지 않으신다. 그보다는 사도행전 17장 28절에서 바울이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라고 말한 것과 같이 창조하신다. 매순간 뛰는 우리의 심장 박동은 하나님의 손, 토기장이의 그 손(사 64:8)은 여전히 우리를 빚고 계신다. 단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손을 떼신다면, 우리는 소멸될 것이다.

인간 토기장이는 하루하루 몸을 구부려 죽어 있는 진흙덩이를 빚으며 살아간다.이 진흙덩이는 토기장이 손이 가는 대로 죽은 듯 복종한다. 다 빚은 토기의 모양이 엉망이라면, 그 잘못은 정확히 토기장이의 책임이다. 죽은 진흙은 스스로를 빚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애정을 담아 살아있는 진흙을 조각하는 토기장이시다. 인간 토기장이와는 달리, 하나님은 다루시는 매질(媒質)에게 그분의 방향을 따를지 아닐지 선택할 자유를 충만히 부어주신다. 예를 들어 그분의 손가락이 우리의 부분 부분을 깎아내려 하실 때, 우리는 죽어 있는 진흙과는 다르게 그분의 지시에 저항할 수 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누를 때 우리는 복종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누구의 종이 아니며 우리 자신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의 손에 의해서도 빚어지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면서 사탄의 외침에 동참하는 길을 택할 수도 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든, 우리는 항상 빚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흙은 스스로를 빚을 수 없다.

우리가 성도든 악인이든, 혹은 둘 사이에 있는 존재이건 간에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진흙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성도처럼 하나님의 손에 복종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혹은 악인처럼 저항하는 길을 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항이 우리를 독립적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매 순간 우리의 호흡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계속 살아 있게 하심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우리의 마지막 형상은 언제나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나타내 줄 것이다. 우리 선택에 따라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닮을 수도 있고, 아버지된 사탄을 닮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상태이다(요일 3:2). 옳은 일을 하기에 너무 늦은 때란 절대 없다. 우리가 이미 우리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아름다운 무언가로 조각하실 수 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적든지 상관 없이 말이다.   

우리 모든 각 사람은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이기에, 그리고 토기장이의 변화무쌍한 뜻에 따라 구부러지기로(혹은 반항하기로) 어느 쪽이든 결정할 수 있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를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기를 기대하신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존귀한 존재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에 의해 계속 창조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라 말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아무리 하나님의 창조 과정일지라도 그것이 무한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더 이상 복종과 반역 중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에 우리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 주 본문인 마태복음 25장 31-46절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가 선택했던 아버지의 유산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분의 나라를 받을 것이나 사탄의 자녀들은 영원한 불외에는 아무 것도 상속 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심판을 받게 되는가?

예수님은 사람들이 행했던 선한 행동에 따라 심판 받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기독교에는 우리가 행한 선이나 악의 양에 따라 예수님이 우리 마음을 심판하기 위해 사용하실 정의의 저울(이집트 신화)이나 행위의 저울(이슬람)이 없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단순히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시지도 않는다. 사실 마태복음 7장 22절에서 예수님은 그분을 믿는 많은 사람들, 심지어 그분의 이름으로 예언까지 했던 사람들도 그분을 믿지 않은 이들과 같은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심판의 근거는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오늘 본문에서 염소들의 예수님에 대한 반응이 흥미롭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언제 주님을 섬기는 일을 등한시 했는지 말해달라고 요구한다. 마치 자신들이 주린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혔으며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아보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명령은 무엇이든 실행했다는 듯이 말이다. 누군가는 이런 무리 속에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613  가지 계명을 모두 지킨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주린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며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아보는 행위가 양의 자리를 보장 받기에 충분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 마음의 겉만 닦는것일 뿐, 우리가 정말 닦아야 하는 것은 우리 마음 속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새 마음을 허락하신다. 그런데 그 마음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일 주린 자, 헐벗은 자, 옥에 갇힌 자를 볼 때 가엾거나 멸시받는 사람으로 여기기보다는 창조되어 가는 사람으로 보게 된다면, 그 마음을 받는 첫 걸음을 옮겼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얼마나 쓸모 없든, 얼마나 지독하든, 심지어는 얼마나 악독해 보이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우리의 새로운 마음은 그 사람에게서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다른 이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 사람에게 무관심하기란 불가능하다. 주린 자에게 우리는 먹을 것을 줄 것이요, 벗은 자에게는 입을 것을 줄 것이며, 갇힌 자들에게는 우리의 시간과 사랑을 전해줄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가 선한 사람이거나 친절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얼마나 무너진 사람인지와 상관없이 우리가 그들 속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을 저주하고 판단하는 대신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 14장 4절에서 말한 이 진리를 깨닫게 된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했던 그대로 우리를 심판하신다. 우리가 혹독하게 판단했다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역시 혹독할 것이다.

양은 모든 일을 올바로 행했던 사람들이 아니다. 거의 모든 자기 시간을 교회에 헌신했던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은 성경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사람들도 아니다. 양은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신 새 마음으로 인해, 그저 세상의 어리석고 무가치하며 구제불능인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웠던 사람들이다.

주린 자를 먹일 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먹인 것이었다. 헐벗은 자를 입힐 때,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옷을 입힌 것이었다. 감옥에 갇힌 이를 방문했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방문한 것이었다.

그러나 염소들은 주린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며 옥에 갇힌 이를 방문했는지 몰라도 그리스도께는 결코 이러한 일을 행하지 않았다.  

단순히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혹은 그들을 동정하기 때문에) 주린 자를 먹인 것이라면, 우리의 도움은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다. 병따개를 사기에는 너무도 가난한 노숙자에게 콩요리 통조림을 건네주고, 영양가 적은 음식들로 무료 급식소를 채우며, 매주 자원 봉사를 하는 노숙자 쉼터에 있는 노숙자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주린 자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은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바라보게 된다. 그들은 단지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을 것이다. 주린 자에게 콩요리 통조림을 건네주는 대신 함께 앉을 수 있는 식당으로 그를 데려갈 것이다. 근처에 사는 가난한 가정을 위해 식사를 준비할 것이며 자원 봉사하고 있는 노숙자 쉼터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 이러한 행함이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사실 다른 이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행함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아직 그분의 원수였을 적에 그들을 위해 죽지 않으셨던가! 그리스도를 음식점에 모셔가는 것처럼 하찮은 일로 어떻게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일을 보상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실망하신 것은 그들이 율법을 고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피하기 위해 율법을 이용하고 있었다. 주린 자를 먹이는 일은 쉽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 그 주린 자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며 그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손길을 돕는 일이 바로 심판의 놀라운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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