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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실천

[듣기 마22:34-46]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Posted by Margaret Foley on with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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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34-46

오늘 본문을 보면 성전이 왁자지껄했다. 한 해에서 가장 바쁜 시절인 유대인의 유월절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틀 전에 새로운 선생이 예루살렘에 와서 생소한 말씀을 가르쳤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 가르침에 대해 선생과 논쟁하고 싶었다. 그 선생의 이름은 예수였다. 어려운 문제를 내서 예수님을 쩔쩔매게 하려고 했던 사두개인 무리를 예수님이 끽소리도 못하게 잠재우신 상황이었다.

망신을 당한 사두개인들이 수군덕거리는 사이에 율법사 한 사람이 일어났다. 바리새파 사람인 율법사는 문제를 내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태복음 22:36).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흥분하면서 소리를 높였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 곳에 모인 구경꾼들의 성경 지식의 수준은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구약성경에 엄청나게 많이 나오는 계명들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점과(구경꾼들 가운데 박식한 사람은 구약성경에 계명이 613가지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계명들을 꼼꼼하게 읽어가면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지 알아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가장 뛰어난 선생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새로 온 선생은 질문에 절절매는 것 같지 않았다. 당황하거나 고민하지 않고 율법사에게 대답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태복음 22:37-38).

힘과 여유가 있는 목소리에 권위가 넘쳤지만 그 사람이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치 누가 부탁한 말을 전달하는 것 같았다.

예수님이 계속 말씀하셨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9-40).

군중들이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리면서 바리새인들 표정을 살폈다. 사실 예수님은 이날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기 전, 세리들과 창녀들이 바리새인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외치셨다(마태복음 21:31). 이제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나올까?

바리새인 가운데 많은 이들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이 골칫거리 선생을 누구도 모르게 없애려고) 있던 반면, 율법사는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율법사는 예수님 말씀을 계속 주의 깊게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마가복음 12:32-33).

다른 종교 지도자들을 지적하고 꾸짖기만 했던 예수님이 이번에는 율법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마가복음 12:34).

하지만 그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난처한 상황에 빠져 찍소리도 못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대신 매우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셨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마태복음 22:42).

바리새인들이 당황해서 눈길을 주고받았다. 저 선생이 이렇게 단순한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지?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거기 모인 무리 중에 가장 어리석은 자라도 그리스도가 다윗과 관계있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에게 무슨 계획이 있는 게 분명했다.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마태복음 22:42). 그들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마태복음 22:43-45).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꼼짝 못 하게 눌러 버리려고 마지막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바리새인들은 분명 예수님을 골탕 먹이려고 찾아왔다. 그러면 예수님도 똑같은 방법으로 그들을 골탕 먹여 쩔쩔매게 하면 안 될 이유가 있는가? 그러나 예수님이 그런 뜻이 아니라 정말 진지한 뜻으로 마지막 질문을 했다면 어떻게 될까?

바리새인들은 메시아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믿고 있었다. 메시아가 압제자들 손에서 유대 민족을 구한 다윗의 순수 자손으로 세상에 온다는 믿음, 그리고 유대 민족이 그때까지 여러 제국(바벨론, 페르시아, 예수님 시대에는 로마)에 시달렸지만 메시아가 와서 해방해줄 뿐 아니라 유대인 제국을 건설하고 자유를 보장해준다는 믿음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만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마땅히 불려야할 이름으로 예수님을 부르지 못했다는 점은 당연하다. 바리새인들은 메시아를 전혀 엉뚱하게 정의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에 관하여 설명을 듣고 싶으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메시아를 찾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옛날에 나일강에서 성 아타나시우스를 찾던 경찰의 태도와 매우 비슷했다. 경찰이 아타나시우스를 태웠다고 의심되는 보트 옆에 순찰 보트를 댔다. 그러나 경찰은 그 성자의 생김새를 모르기 때문에 본인에게 말을 걸면서도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아타나시우스 주교가 타고 있습니까?” 경찰관이 성자에게 묻자 성자가 대답했다.

“아뇨, 아타나시우 성자는 뒤에 오는 보트에 숨어 있습니다.”

경찰은 질문을 중단하고, 뒤에 오는 보트를 조사하러 갔다. 덕분에 아타나시우스는 상 이집트(Upper Egypt)로 안전하게 도망했다.

이야기에 나오는 경찰은 바리새인들과 비슷하지만, 성 아타나시우스와 예수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아타나시우시가 자기 정체를 드러내기 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경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불과 며칠 전에 이렇게 성전에서 종교 지도자들과 대화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일: 승자처럼 예루살렘에 들어가심(마태복음 21:1-11).

월요일: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몰아내심(마태복음 21:12-17).

화요일: 성전에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질문받으심(마태복음 21:23-46, 22, 23)

수요일: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여 살해하려고 작당함(마태복음 26:3-5).

목요일: 최후의 만찬, 체포당하심(마태복음 26:17-68).

금요일: 빌라도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달리심(마태복음 27장).

 

또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 하였도다.”

예수님이 여기서 누가 더 재치 있느냐를 놓고 바리새인들과 겨루고 계신 게 아니다. 예수님은 세리들과 창녀들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만큼 바리새인들도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기를 바라신다. 앞서 말했듯이, 바리새인과 창녀의 유일한 차이는, 창녀는 자기가 죄에 오염된 본성을 지녔고 영적으로 무지하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데 있다. 그리스도께서 창녀에게 메시아를 정의해주실 때 아마 창녀는 말씀해주시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말씀을 연구하고 몸을 정결하게 하면서 평생 헌신적으로 살았으니까 자기는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길 테고, 예수님이 제자에 관하여 새롭게 정의해주신 말씀도 뿌리치고 스스로 정의한 대로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눈을 뜨도록, 대답하기 불가능한 질문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질문에 그리 대답하신 데는 가르치려는 의도도 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편의를 봐주려고 613가지 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해주신 게 아니다. 예수님은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예를 들어서 우리 마음이나 뜻에 하나님 말고 다른 무언가를 위한 자리를 지정해놓으면), 613가지 계명을 다 어기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암담한 소식이다. 바리새인들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자기들의 부족함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참 하나님이신 그분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그분을 죽이려고 가장 뾰족한 수를 짜내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이 계명을 언급하신 직후에 이 침울한 소식을 전한 것은 실수가 아니다. 그 계명을 우리 힘으로 절대 지킬 수가 없지만, 메시아께서는 우리가 불완전한 죄인이라 짊어질 수밖에 없는 짐을 벗어 던지게 길을 내어주신다. 메시아께서는 육신의 자유를 주지 않지만 (사실 그 반대를 약속하신다) 613가지 계명을 다 지킬 수 있는 자유를 주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신다.

다음 질문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만 물으시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듯이 당신에게도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가복음 8:29).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대답하겠는가? 아니면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이 중요한 분이라는 사실을 무시해버리겠는가? 어떻게 대답하든 자유이지만, 정직하기 바란다. 사람들한테는 거짓말을 할 수 있어도 그리스도께는 거짓말이 안 통한다.


[1] Christopher Loveless, Strange Eventful History: The Story of the Saint (Lulu.com, 2012), 95-96.

Tags: 바리새인, 사랑, 예수님, 자유, 메시아, 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