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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마17:1-9] 그리스도의 변형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Posted by Margaret Foley on with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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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7:1-9

현대인들은 마태복음 17장1-9절과 같은 말씀을 읽을 때, 회의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거나,”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것”을 본 적이 없으며,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 같은 성경 속 권위자들과 대화를 나눈 적도 없기에,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빠르게 일축하고, 그들의 경험과 연관 있는 다른 것으로 옮겨간다.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가장 명백하고 진실되며 정직한 방법이라고 요즘 사람들은 생각한다. 결국, 오늘날 삶의 기본적인 철학은 온 세상에 관하여 명백하고 진실되며 정직한 것은 오직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의지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추정한다. 또한 발전된 기술을 통해 우리가 만든 장치와 과학이, 보고 만지고 의지를 가지고 하는 것들만이 온 세상에 관하여 명백하고 진실되며 정직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러한 삶의 철학은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북한 사람들은 이런 사고방식을 ‘유물론’이라고 칭한다. 서양인들은 이것을 ‘실증주의’, ‘과학만능주의, 또는 ‘환원주의’라고 부른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부르던 상관없이 이는 예수님의 변형을 불가능한 것 혹은 종교적 발상이라 부른다.

사람은 전자파라고 알려진 빛의 파동의 움직임에 따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눈은 전자기 스펙트럼(주파수 또는 파장에 의해 배열된 광파 스펙트럼)의 작은 부분만을 식별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가시적인 스펙트럼 즉 빨강색부터 보라색까지의 모든 색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파장 아래 혹은 너머에 있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일례로, 우리는 가시광선보다 낮은 파장을 가지고 있는 적외선을 볼 수 없고, 또는 가시광선보다 높은 파장을 가지고 있는 자외선도 볼 수 없다.

실제로, 우리는 전자기 스펙트럼의 0.0035% 정도만을 볼 수 있다.

유물론자/실증주의자/환원주의자/과학만능주의자들은 말한다. “이것이 진실일 수 있으나, 우리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전자파를 측정할 수 있다. 우리의 측정을 통해 우리 사람들은 보이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우주의 대략 95%가 암흑 물질(그리고 암흑 에너지로 불리는 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과학자들은 암흑 물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암흑 물질은 물리학 등식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암흑 물질이 없으면 이 등식들은 무너진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 어떤 과학자도 암흑 물질을 측정하는 결정적인 방법을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또 이것이 무엇인지 설명한 사람도 없다.

만약 사람이 오직 0.0035%만을 볼 수 있고 이미 알려진 세계의 5%만을 감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왜 우리가 모든 것을 보고, 감지하고, 측정하고, 증명할 수 있다고 추정하는가?

이 논의는 과학에 맞서는 것이 아니다. 이는 목격될 수 없거나 측정될 수 없는 모든 것은 허튼 것이라는 주장에 맞서는 것이다. 과학 자체는 절대 이 주장을 내지 않는다. 과학이 그나마 겸손한 것은 무언가가 있든 있지 않든 관계없이, 과학이 증명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명확히 안다는 것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비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진정한 예술과 과학의 원천이다. 놀라고 경외함에 사로잡혀 잠시 멈추는 것이 더 이상 어려운 자, 즉 감정이 낯선 자는 죽은 자와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의 눈은 닫혀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신비한 것으로부터 자기의 좋은 목적과 겸손을 끌어낸다. 과학만능주의, 혹은 우리가 그 좋은 목적과 겸손으로부터 과학을 들어올리는 개념에 부여하는 어떤 이름도, 우리의 눈을 열어 주기보다는 닫게 만든다.

그러면 유물론, 실증주의, 과학만능주의는 마태복음 17장1-9절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정답은: 보이는 것 그 이상이다.

우리가 이런 상황을 본 적이 없는 까닭에 마태복음 17장1-9절을 보고 일축하고, 이런 현상을 측정하지 못하거나, 의지로 사람의 경험 안에서 발생시킬 수 없을 때, 우리는 요점을 정확히 놓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 본문에 관한 것이다.

이 본문 바로 전에 오는 구절을 보면, 예수님은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라고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그 후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다. 거기서, 그들은 인자를 봤다.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바뀌신 분이 예수님인가?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을 정확하게 똑같이 설명하고 있다. 니케아 신경도 예수님이 빛으로 나신 빛이시며”라고 우리를 상기시켜 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절대 변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대로 똑같으시다면, 무엇이 바뀐 것인가?

마태복음 17장9절에서 예수님은 변형되신 것을 눈에 보이는 어떤 광경으로 설명하신다. 예수님이 바뀌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변한 것이다. 그 순간,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사람이 볼 수 없는 것, 항상 그래 왔던 어떤 찰나를 보도록 허용된 것이다. 그 순간, 그들은 사람들이 보통 볼 수 있는 0.0035% 이외의 무엇, 즉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고 우리 앞으로 보통 지나치는 우주의 다른 95%에 속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심지어 생각조차 못하는 제한된 부분에서 들림을 받은 것이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성도의 교통’을 믿는다는 기독교 믿음의 핵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는 믿는 자들이 죽어도, 그들이 존재하는 것을 멈추지 않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들을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그들과 대화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성도들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히브리서 12장1-2절은 그들을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로 설명한다. 그들은 우리를 언제나 둘러싸고 있고, 우리를 격려하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변형하실 때 단순히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성도의 교통’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고, 그분과 완벽히 교통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완벽한 교통 안에 있으며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완벽히 교통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눈, 측정기, 의지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들은 동일하게 우리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변형하신 그 순간 세상이 신비스럽게 변한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서 우리는 아이슈타인이 말한 죽은 자와 같다. 우리의 눈은 닫혀 있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알수록, 우리는 덜 보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은 과거에 그랬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세계를 볼 수 있는 시력을 부여받은 것이다. 

Tags: 과학만능주의, 마태복음 17:1-9, 변형, 보이는 것, 성도의 교통, 실증주의, 아인슈타인, 예수님, 유물론, 회의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