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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마11:16-19, 25-30] “세례 요한은 왜 예수님을 의심했는가?”

Posted by Margaret Foley on with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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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1:16-19, 25-30

본문은 매우 미스터리한 말씀이다. 이 미스터리에는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관련되어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알아야 한다.

세례 요한은 누구인가? 성경은 그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말씀하셨다( 11:9).
  • 본문에서 예수님은 또한 세례 요한에 대해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11:11).
  • 세례 요한의 어머니와 예수님의 어머니는 친척 간이었다(눅1:36).
  • “무엇이 세례 요한을 위대하게 만들었는가?” 사실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올바른 질문은누가 세례 요한을 위대하게 만들었는가?”이다. 대답은 하나님이시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한 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일을 그에게 맡기셨기 때문에 위대했다: 그는 하나님이 택하신 메시아를 위한 길을 예비해야 했다(눅1:16-17). 하나님은 세례 요한이 그 일을 요단강에서 침례(세례)를 베품으로써 하게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침례(세례)를 받으러 왔다(눅3:3).
  • 그러나 침례(세례)를 베푸는 것이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메시아 자신이 침례(세례)를 받기 위해 모습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침례(세례)를 받기 위해 세례 요한에게 오셨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막아서며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마 3:13-15).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침례(세례)를 베풀었을 때, 그는 성령님이 예수님 위에 임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 후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1:32-34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가리켜 이보다 더 나은 자가 없다고 하신 것은 단지 예의상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침례(세례)를 주라고 선택되고 준비된 자보다 더 큰 자가 어디 있겠는가?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본문의 미스터리를 이해할 수 있다. 본문에 나온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이다. 이 부분이 미스터리인 것은 아니다: 세례 요한은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헤롯왕을 비판했었다(마 14:3-4).

세례 요한이 감옥에 있었을 때 그는 제자 두 명을 예수님께 보내어 이렇게 질문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미스터리는 다음과 같다:

세례 요한은 왜 예수님을 의심했을까? 그는 평생 동안 하나님이 택하신 분을 위한 길을 예비해 왔다. 그는 성령님이 예수님께 임하시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그에게성령이 비둘기같이 강림하는 자, 그가 내가 택한 자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일을 모두 목격한 세례 요한이 어떻게 예수님을 의심할 수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감옥에서 고통받아 생긴 일이다. 신앙을 그렇게 잃을 수도 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낸 뒤 얼마 되지 않아 참수를 당했다(마14:10). 아마도 그는 끝이 오고 있음을 알았고 그는 단순히 두려웠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아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1:7). 즉 그 무엇도 세례 요한을 두려움에 떨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책망하지도 않으셨다. 이것이 이 미스터리의 중요한 단서이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하는 것처럼 보였을 때조차도 예수님은 여전히 그를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큰 이라고 칭찬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과 세례 요한의 사명은 분리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장터에 있는 어린아이들에 관한 비유를 통해 무리가 예수님뿐만 아니라 요한도 배척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칭찬과 공감의 말씀만을 하셨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왜 예수님을 의심했을까? 두려움이 의심의 원인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열쇠는 25~27절에 있는 예수님의 기도이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기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매일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진실 중 하나를 배우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인지에 속박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아들이 드러내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성경 전체를 읽을 수 있고 또 암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면, 성경을 읽어도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 교회에 갈 수도 있고 하루 24시간 내내 기도할 수도 있다. 전 생애를 하나님께 바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면, 여전히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코 앞, 2센티미터 떨어진 곳에 서 계신다 해도, 그가 자기를 보도록 허락하지 않으시면 여전히 그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것은 지혜롭고 슬기롭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데 아무 이점이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원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세리와 죄인, 목동, 나병 환자, 아이들, 과부 그리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기로 하셨다.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들이나 종교 지도자, 정치 지도자에게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중요하거나 당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자신에게 좋게 보이므로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당신이 거룩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당신에게 드러내기로 하셨기 때문에 당신이 거룩한 것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 흐르는 주제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0-21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지만 이 내용을 듣고아하!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내 잘못은 아니군요. 하나님의 잘못이네요. 하나님이 내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으니까요. 만일 드러내셨다면, 나는 하나님을 이해했을 거예요.”라고 말하면 안 된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모든 고을에 화가 있을거라고 말씀하셨다( 11:20-24). 그러나 세례 요한에게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드러내신 모든 것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택하신 분을 위한 길을 예비했다. 그는 자신의 임무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갈릴리 고을들은 충실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셨으나, 그를 배척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21-22에서 예수님은 그 고을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왜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갈릴리 고을들 보다 견디기 쉬운 것일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이 그들에게 무엇을 드러내셨는지를 아시기 때문이다. 갈릴리 고을들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사람의 형태로 드러내셨다! 바로 코앞에서 그들을 가르치고 치유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이 심판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사실, 에스겔 26-28에서 하나님은 성경에서 가장 가혹한 심판을 두로와 시돈에 내리신다! 에스겔 26:21에서 하나님은 두로에게, “내가 너를 패망하게 하여 다시 있지 못하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고을들에게그 심판이 가혹하다 생각했느냐? 너희 고을에 대한 심판은 훨씬 더 가혹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실, 어떤 고을에 사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제 잘못은 아니에요. 하나님 잘못이에요.”라고 말할 수 없다. 로마서 1:18-20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심지어 북한 사람들조차도 하나님께, 북한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몰랐어요. 김일성의 잘못이에요. 우리는 유물론 교육을 받았어요. 우리에겐 변명거리가 있어요.”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바울은 말한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이 지구상에 존재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충분하게 드러내셨으므로 어느 나라 그 누구라도 변명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모순되는 두 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실 때만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이 일어나도록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현명하거나 슬기로운 사람이 아닌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셨으므로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 상충하는 두 생각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본문의 핵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드러내고자 하시는 방식 그대로, 하나님이 드러내시고자 할 그때, 하나님의 드러내심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원하는 때에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주실 것을 고집한다. 예수님 세대에 사람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모두 배척했다. 또한 그들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은 하나님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18-19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예수님]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우리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하나님이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실 때, 그분의 모습은 우리가 그리는 그분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을 보지 못하거나, 그를 배척한다.

세례 요한조차도 이 문제와 씨름했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모습의 메시아로 오실지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마태복음 3:12에서 요한이 품은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요한은, “손에 키(winnowing fork)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에서 손에 쥔 유일한 키는 잔치할 때 사용하는 포크였다. 세례 요한이 혼란스러워했던 것은 당연하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에 대한 올바른 그림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쭉정이를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세례 요한은 그 날이 자기 당시이기를 바랐지만, 아직 그때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려 애썼기 때문에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여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는 의심했으나 그 의심을 하나님께로 가져왔다. 우리의 의심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데려갈 때 그는 영광을 받으시며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그림이 참된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거나, 또는 우리의 인간적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면,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우리의 변명이 통하는 대신 지옥이 예상될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마태복음 11:6에서 그 대답을 볼 수 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기 원하실 때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이 있다. 히브리서 1:2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시는지를 알려준다. 바로 그의 아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신다. 본문의 예수님에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를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며, 아버지는 아들을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이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현명한 사람이다.

이것을 아무런 갈등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어린아이들이다.

하나님이 드러내고자 하시는 방식으로, 아들을 통해, 그가 드러내기 원하시는 때에,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3:7에서 말한 대로) 오늘,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겸손하자. 성령님을 통해 말씀하시는 그의 음성을 들을 때 어린아이처럼 겸손히, 열린 마음으로 반응하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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