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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실천

[듣기 마 21:23-32] “예수님은 왜 창녀와 세리를 사랑하셨을까?”

Posted by Margaret Foley on with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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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23-32

그만 또 반복하고 말았다.

유혹과의 강렬한 한판 승부 후, 다시 굴복하고 말았다. 나머지 케이크 한 조각을 더 먹어버렸다. 새 핸드폰을 사기 위해 예산을 초과하고 말았다. 배우자를 이해하기보다는 그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이제 당신은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럴 때 당신은 어떻게 처신하는가?

우리는 새롭게 다짐함으로써 회개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번엔 좀 더 열심히 노력해야지!”

그러나 이러한 다짐은 계속되는 죄와 회개의 반복을 끊어낼 만한 힘이 없다.

몇 달, 며칠 아니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또다시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왜 그럴까?

마태복음 21:23-32 말씀이 이러한 현상을 설명해준다.

본문 말씀 서두에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한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마 21:23)

이 질문은 매우 추상적이고 이론적이므로 대체로 주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권위가 아버지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이 본문이 우리의 삶과 연결될 수 있는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바로 뒤이어 나오는 비유에만 관심을 두고 이 말씀은 무시해버린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이 구절들의 연관성과 성경 전체의 공통된 주제를 놓치고 만다.

대제사장들과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정교한 이론적 논쟁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거듭 되풀이하시는 견책의 말씀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

성경에서 예수님은 전반적으로 세리와 창녀에게 친절과 호의를 보이신다. 요한복음 8:1-11에서는 간음한 여인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마가복음 2:13-17에서는 레위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며, 누가복음 19:1-10에서는 세리인 삭개오가 자신의 소유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할 정도로 영향을 끼치셨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친절을 약점(혹은 위법한 일)으로 해석했다. 예를 들어, 창녀가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적실 때 종교 지도자들은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눅 7:39).

그들이 이렇게 비웃자, 예수님은 그들의 위상, 즉 창녀와 세리보다 못한 그들의 위상을 깨닫게 하신다. 이것은 매춘이나 세금 징수의 행위가 본질적으로 구속적인 어떤 것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분명히 두직업은 모두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주장 뒤에는 더 깊은 근거가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스도의 시대에 창녀와 세리는 죄인 중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창녀는 생계를 위해 가장 동물적이고도 원초적인 인간의 욕망을 이용했다. 창녀는 스스로 죄에 빠져들었을 뿐 아니라, 그들 존재 자체가 다른 이들을 어두운 죄의 길로 유혹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매춘은 가난과 압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으므로 이러한 견해는 분명 단순하고도 잘못된 시각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당시의 우세한 의견이었다.)

세리 또한 돈을 위해 윤리를 돈과 맞바꾸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말 그대로 이들은 정부에 바칠 세금을 걷을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정부로부터 급여를 받진 않았다. 누구나 세리는 세금을 과중하게 부과함으로써 자신의 생계를 꾸린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의, 정의, 혹은 동료 인간보다는 돈을 더 좋아하는 거짓말쟁이, 도둑으로 여겼다.

그들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창녀와 세리 사이에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었다. 그들 모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숨길 수 없었다. 창녀 집을 남자들이 들락거리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누구나 한번쯤은 세리에게 세금을 뜯겼을 것이다. 직업의 특성상 창녀와 세리는 자신의 본성을 다른 사람, 더 중요하게는 자신으로부터 숨길 수 없었다.

예수님은 이것이 바로 세리와 창녀의 훌륭한 점이라고 설명하신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3).

다시 말하면, 자신이 선하지 않음을 아는 자, 자신이 잘못하고 있음을 아는 자, 그리고 이 두 사실을 다른 사람과 자신에게 숨길 수 없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이다.

천국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안주하고 있다면, 이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예수님과 교류하는 창녀와 세리는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오거나(눅 15:1), 그와 함께함을 크게 기뻐했다(눅 19:5-6). 이들은 삶의 많은 부분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과 그보다 먼저 온 세례요한을 통해 현재의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을 보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삭개오의 회개의 행동을 통해 가장 잘 입증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구원받은 음행한 여자조차도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해방된다(요 8:11).

이들은 자신의 죄에 만족해하는 죄인이 아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대적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종교인들은 자신의 죄에 만족해하는 죄인들이다.

대체로 이러한 만족감은 무엇보다 죄 된 본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마 21:31-33).

종교인들(그리스도 시대의 유대인이든 또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이든)은 죄를 아주 잘 알아차린다. 바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종교를 찾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우리의 죄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더 잘 보는 아주 고약한 습관이 있다. 우리는 창녀와 세리와 같은 우리 자신의 마음은 진지하게 돌아보지 않은 채 오늘날의 창녀와 세리에게 온갖 저주와 지옥불을 쏟아낸다.

그러다가 간혹 우리의 죄를 생각할 때에는 우리 자신의 약한 의지력 문제로 접근한다.

“내가 엄청난 짓을 하고 말았지만, 이것을 고치기 위해 좀 더 열심히 애써볼 거야. 내가 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이유는 없어.”

예수님에 따르면 불행히도 이는 우리가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처지이다. 우리가 죄(그리스도께서 깨끗이 씻기 위해 죽으셨던 바로 그 죄들)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대신 우리 자신을 신뢰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행동으로 초래된 결과를 겪을 기회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선한 다짐이 우리를 다시 죄의 문 앞으로 인도하고 마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악한 성품을 부인하지도, 숨기지도, 갈구하지도 않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로 예수님께 나아가, 종교 지도자를 덜 닮고 창녀와 세리를 더 닮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자신은 벌레보다 못한 자임을 깨닫고(시 22:6) 겸비한다면, 우리는 복을 받고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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