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ice Of The Martyrs - Korea

Go

말씀과 실천

[듣기 누가복음 24:13-35] 예수님은 왜 글로바에게 성경을 풀어 설명해 주셨는가?

Posted by Margaret Foley on with   Comments

순교자의 소리의 다른 영상들을 보기 원하시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누가복음 24:13-35

만일 우리가 글로바와 함께 엠마오로 가고 있다면, 아마도 예수님의 이야기는 비극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닌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은 가장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죽음이었다. 십자가는 가장 비루한 범죄자들, 즉 노예, 강도, 해적과 반역자 같은 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고문 방법이었다. 십자가의 목적이 무엇인가? 대중이 반역을 꿈도 꾸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형을 받은 당사자의 고통이 끈질기고 비참하게 이어져 대중에게 노출되는 시간 또한 극대화되었다.

십자가 형보다 더 수치스러운 것은 없었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것보다 자살하는 것이 낫다.” 또 어떤 로마인은 이에 동의하며, 로마인들은 십자가로부터 그들의 몸, 마음, , 귀가 멀리 떨어져 있도록 항상 유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는 생각하는 것조차도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특히 십자가 형을 당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관련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수치의 굴욕을 당했다.

만일 당신이 글로바와 함께 걷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진정 비극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사건이었지만,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사실은 사태를 더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물론, 글로바는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지만, 제자들이 여자들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고 말한다. 어쨌든, 성령님 없이, 여자들의 증거를 믿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비극적이라고 하기엔 부족하다. 글로바와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 거는 큰 소망이 있었다. 글로바는 예수님에 관해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시다”라고 했다(19). 이것은 누가복음 1장 사가랴의 노래를 떠오르게 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68-69절). 예수님은 그들의 위대한 구원자이셨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을 보기는커녕, 제자들은 가장 수치스러운 사형 집행으로 고난받는 예수님을 목격했을 뿐이다.

제자들에게 이것은 진정 비극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누가복음 2413-35절은 비극 이상, 즉 희비극이다.

예수님은 절망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게다가, 예수님이 즉각적으로 자신을 밝히지 않으셔서 몇 가지 우스꽝스러운 코미디가 연출되었다. 특히 글로바가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18)라고 묻자, 예수님이무슨 일이냐”(19)라고 대답하신 부분이 그렇다.

하지만 예수님과 글로바의 대화는 희극적 요소 이상의 깨우침을 준다. 예수님과 글로바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인내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자신을 소개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글로바와 함께 걷고 대화를 나누셨다. 그리고 들으셨다. 글로바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글로바의 뒤통수를 때리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은 인내가 많으시다. 그분은 또한 긍휼이 많고 용서하는 분이시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실 당시, 제자들의 행동을 기억하는가? 그들은 도망쳤다. 사도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방 안에 가두었다. 심지어 지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그들을 찾고 계신다.

비록내가 너를 용서한다.”라는 말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미 글로바에게 용서를 베푸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글로바와 함께 걸으셨고, 대화를 나누셨으며, 심지어 글로바가 집에 함께 유해 달라는 초대에도 응해 주셨다. 글로바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용서하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용서하는 분이시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걸으시고, 대화를 나누시며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셨다. 예수님은 왜 글로바에게 성경을 풀어 설명해 주셨을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수없이 들었다.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는 따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풀어서 설명해 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시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성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럴까?

그들이 성경 훈련을 잘 받지 못해서일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구약을 손바닥 보듯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그들은 유대 역사와 유대 문화의 전문가였다. 히브리어의 뉘앙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능통한 바리새인들도 성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흔히, 우리는 만일 (1) 예수님과 함께 살았다면 혹은 (2) 유대 문화를 잘 이해한다면, 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자들과 서기관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설명해 준다. (1), (2)가 모두 도움이 될 수는 있으나, 성경을 이해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만이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이시다.

유능한 미스터리 작가들은 대체로 글을 쓰기 전에 범죄를 계획한다고 한다. 글을 쓰는 동안 작가들은 해결의 실마리를 소설 전반에 걸쳐 흩어놓는다. 그 소설을 처음 읽을 때는 이 단서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해법을 깨달은 후에 소설을 다시 읽으면 단서들이 훨씬 분명하게 보이곤 한다.

예수님은 성경을 이해하는 해법과 같다.

만일 마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성경을 읽는다면, 성경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고 읽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남겨두신 단서를 아마 간과하거나 잘못 해석할 공산이 매우 크다! 바로 제자들과 서기관들이 이렇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 설명해 주셨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이 성경은 이해했지만, 그분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의 마지막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

집에 들어가신 후,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감사기도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이 구절에 사용된 말씀은 누가복음 22장19절의 말씀과 매우 비슷하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감사기도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성찬식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기로 선택하셨다.

예수님이 떡을 떼시고 글로바에게 주실 때, 그의 눈이 열렸다. 이와 같이, 우리도 성찬식을 할 때, 우리의 눈이 새롭게 떠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찬식을 성례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찬식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내시기로 선택하셨다. 떡과 잔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글로바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본문 말씀에 직접적인 명령은 없지만, 예수님과 글로바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드러내신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의지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가장 주된 방법은 성경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 없이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찬식을 통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품과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꺼이 듣고 그와 함께 떡을 떼어야 하는 것이다.

로마인들은 십자가를 비극으로 여겨 십자가에서 눈을 떼라고 하지만, 우리는 이 본문 말씀을 통해, 십자가는 비극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영광임을 배울 수 있다.

 

Tags: 글로바, 비극, 성경 말씀, 성경 이해하기, 수치, 십자가, 엠마오로 가는 길, 예수님, 제자들